insert visit_log successfully
부산시교육청 성인지매거진
본문바로가기 상단주메뉴 바로가기
부산광역시교육청 성인지매거진
닫기
나와라!성인지 뷰페이지 입니다.
전쟁, 케테 콜비츠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06-11

    등록된 파일이 없습니다.


 

 

독일 베를린에는 전쟁피해자를 추모하는 기념관 노이에 바헤가 있다. 웅장한 기념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피에타라 불리는 조각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피에타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어머니 마리아가 껴안고 슬퍼하는 도상을 말한다. 성스러운 모자를 묘사한 수많은 피에타상들이 있으나 노이에 바헤의 피에타는 성스럽다기 보다 인간적이다. 조각상 위의 천장이 원형으로 뚫려있어 모자상이 고스란히 비와 눈을 맞도록 한 것조차 그러하다. 

 

웅크려 앉은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여윈 몸을 자신의 온 몸으로 감싸안고 한 손은 아이의 이마를, 또 다른 손으로 온기를 잃은 두 손을 사랑스럽게 매만지고 있다. 여인의 얼굴은 투박한 두건으로 가려져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만이 그녀의 고통을 전한다. 생명이 사라진 자식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깊은 통증이 고요한 공간 가득 소리없이 울려퍼지고 있다. ‘내 아이야!’ 아들의 주검과 하나된 어머니의 청동상은 어떤 말도 대신할 수 없는 말로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전한다.

 

아이를 잃은 여인은 조각을 만든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든 케테 콜비츠의 아들은 1차대전 중 자원입대하여 열여덟의 나이로 전사했다. 참전한 지 두 달만의 일이었다 .

 

케테 콜비츠는 1867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일찍 예술을 접하였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문적인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었다. 1889년 베를린에 가서야 여자예술학교에 입학하여 판화와 회화를 배웠다. 결혼 뒤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의사였던 남편 칼 콜비츠를 따라 빈민가에서 생활했는데 이 경험은 콜비츠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케테는 노동자들의 삶을 알게 되면서 특히 노동자 계급의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에 분개했다. 여성들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고 그나마도 건강하고 임신하지 않았을 때야 가능한 일자리였기에 불법적인 임신중절이 흔하게 행해졌다. 케테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운명에 연민을 느꼈으나 작품 속에서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삶에서 보여주는 역동성과 소박한 숭고함에 주목했다. 1903년 그녀의 대표작 <폭발>은 저항하는 농민들을 이끄는 여성의 뒷모습을 긴장감 가득한 필치로 묘사하여 억눌려있던 이들의 열정과 시대를 선도하는 힘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1910년대 그녀가 만든 <직조공들>, <농민전쟁> 판화 시리즈는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아름답고 강렬하게 묘사했다. 케테는 예술이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넘어서서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과 만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191471차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전까지의 전쟁들은 대부분 짧고 전투 한두번으로 종결되었기에 사상자도 적고 피해도 적었다. 사람들은 이번 전쟁 역시 마찬가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은 산업혁명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이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를 만들어냈고, 그 발전이 전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참혹한 전쟁이 이제야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141030일 케테 콜비츠의 일기에는 단 한줄만이 적혀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세상을 흔들었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대의를 위한 싸움을 고귀하게 표현했다면 이제 다른 질문이 그의 그림에 등장한다. ‘과연 고귀한 희생이란 존재하는가그는 오랜시간 자신의 슬픔을 녹여 <전쟁>연작 시리즈를 만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 이상 누구도 전사해서는 안된다.’ <지원병들>에서는 해골모습의 병사, 우는 병사 등으로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전쟁의 모습을 표현했고, <과부>, <부모> 등의 작품에서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와 연관된 사람들의 슬픔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전한다. 1934년 독일에 극우적인 나치정부가 집권한 뒤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전쟁은 이제 그만>과 같은 작품을 통해 반전과 평화를 향한 목소리를 높였다.

 


 

 

나치 정권은 그녀의 반전 미술이 전시되는 것을 금지시켰고 공개된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막았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1937년 모두의 아들을 위한 진혼곡과 같은 피에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 페터를 폴란드 전선에서 잃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유언과 같은 작품을 남기며 말했다.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 이것은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그림 속 한 늙은 여인이 망아지처럼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숨기고 그 위로 팔을 힘있게 뻗친다. 케테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작품 속 여인들처럼 가녀린 생명을 보호하고 세상을 힘차게 끌어안으며 떠났다. 

 

문현여자고등학교 교사, 작가 이서연

교육자료
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