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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나도 성인지 크리에이터! 공모전 대상 수상작] 한번 지고 피는 꽃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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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름한 새벽녘, 잠에 들지 못한 채 시간만을 죽이고 있다. 조용히 숨을 내쉰다. 그럴 때마다 왠지 폐에 묵직한 것들이 가득 찬 것만 같다. 오늘의 해가 뜨고 있다. 내가 이렇게 괴롭고 우울한 이 순간에도 태양은 떠오르고 있다.


정돈되지 않은 짧은 다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다. 꼭 감은 눈 밑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고 잔뜩 갈라진 입술 사이로 옅은 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볼 위에 희미하게 눈물 자국과 멍자국이 남아있었고, 목이 다 늘어진 하얀색 티셔츠는 일주일이 넘도록 세탁하지 않은 듯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익숙하게 컴퓨터 앞에 자리 잡았다. 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과 모니터 빛만을 의지하며 지낸 지가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일회용품 쓰레기와 술병이 나도는 원룸에서 매일 인터넷 사이트를 쥐 잡듯이 뒤지고 있다. 혹시라도 내 사진이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누군가 나를 찾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감, 이런 것들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 스트레스 탓인지 먹지를 못 한다. 움직이기도 힘들다.


--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동공이 커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다. 무섭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솔아, 나야.” 미나다. 내 오랜 친구 미나. 내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 너무나도 고맙다. 하지만 아직 만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별건 아니고, 줄게 있어서 왔어. 너한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문고리에 걸어 놓았으니까 나중에 꼭 확인해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나는 자리를 떠났는지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문 앞으로 갔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대리석의 서늘한 기운이 우울함을 자극한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문 손잡이가 어색하다. 슬며시 연 문틈 사이로 오른손만 내밀어 미나가 두고 간 종이 가방을 가져왔다. 종이 냄새와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아 책이나 자료 같다. 종이 가방을 열어서 확인해보니 내 예상이 맞았다. 불법 촬영과 관련된 뉴스나 법적 자료들이었다.


열아홉, 수능이 끝난 그때 첫 연애를 시작했다. 항상 짝사랑만 해오던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했다. 처음 하는 사랑이 달콤했지만 부끄러웠던 나는 비밀 연애를 원했다. 친절하고 모범생에 훈훈하게 생겼던 그 아이는 나를 정말 좋아해 주었다. 항상 다정한 목소리로 나와 대화하고 다투게 되어도 먼저 사과하던 그런, 아주 멋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귀게 된 지 6개월이 흘렀다. 대학교에 들어가고 우리는 서로 다른 학교였지만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내 친구 중 한 명이 그 아이와 사귄다는, 정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 착한 애가 그럴 일이 없다며 나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둘이 팔짱을 끼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누군가 내 머리를 세게 친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쫓기듯 뛰쳐나갔다. 성인이 되고 홀로 서게 된 집에서 숨죽여 울었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연인에 대한 배신감에 가슴이 꽉 막힌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다음 날, 그 아이의 집 앞에서 이야기를 했다. 아픔을 겪은 나를 위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굳게 먹고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의 겉과 속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좋다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 애는 어디에도 없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 아래로 핏발 선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노려보았다. 날 선 시선에 나는 두려웠지만 용기 내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것은 그 아이의 목소리가 아닌 거친 손길이었다. 붉게 물든 볼에는 피멍이 들었고, 귀에는 이명이 돌았다. 고통에 찬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명 사이로 그 아이의 고성이 들려왔다. 자신이 나를 봐준 거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둥 나를 모욕하는 저속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휴대폰을 들이밀더니 자신과 헤어지면 이 사진을 뿌려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 사진은 언제 찍었는지 모를 나의 나체 사진과 몰래카메라 영상들이었다. 그 아이가 바람을 피운 것보다 나를 몰래 촬영한 것이 더욱 크나큰 충격이었다.


도대체 그 사진은 언제 찍은 것 일까. 나는 그 아이와 밤을 보낸 적이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개강 파티 때 인가? 아니면 그 아이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각자의 친구들이 모여 술 마신 그때? 도저히 모르겠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몸집을 키우고만 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온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냥 이 모든 게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죽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죽음을 꿈꾸며 잠에 들었다. 그 후로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사귀는 것도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 그 아이에게 사진을 지워달라며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항상 내 연락을 무시했다. 그렇게 16번째 연락을 한 날 그 아이는 귀찮다며 그 사진은 사이트에 올려버렸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 아이의 SNS에 들어가 보니 링크를 하나가 있었다. 그 사이트는 불법 포르노 사이트였다. 나의 동의 없이 촬영되고 유포된 사진은 안면조차 없는 사람들의 희롱 거리가 되어있었다. 순식간에 입에 담지 못 할 저질스러운 말들이 가득 찼다. 충격적이었다. 나를 제외한 많은 여성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불법적으로 촬영되고 유포되고 있다.


며칠 동안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붉게 충혈된 눈 밑이 퀭했다. 나가버린 정신을 겨우 붙잡고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 부모님의 눈물의 처음 보았다. 내가 사춘기 때문에 아무리 속을 썩여도, 아파서 쓰러지거나 해도 부모님은 그저 묵묵히 나를 안아주셨다. 그런 강인한 분들이셨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설움이 눈을 비집고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울었다.


친구들에게도 이 일을 알렸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되려 나를 나무라 했다. 이게 내 잘 못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수치심은 막지 못했다. 유일하게 미나만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오직 미나만이 나를 위로해주고 보듬어 주었다.


그리고 이주일 전쯤, 미나의 도움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뒤늦게라도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한 번 퍼져버린 사진은 완전히 지우기는 힘들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다고 했다. 미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생 동안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일을 겪었다.


미나와 함께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평일 오전이었는데도 거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지각을 한 듯한 학생도 있었고 가게 영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고 싱그러운 여름의 공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나는 그 풍경 속에 물들여지지 못했다. 괜히 불안했고, 그 아이에게 배신을 당하고 구타당한 이후로 남자가 무서워졌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나에게 폭력을 가한 적도, 협박을 한 적도 없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두려웠다. 미나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사람들이 다가올 때마다 자신과 자리르 바꾸어주며 사람들과 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고마웠다. 전에는 그냥 모든 사람들이 두렵고 무서웠다. 지금 이렇게 밖에서 거리를 누비고 있는 것도 미나의 도움이 컸다. 그렇게 집 근처에 다다랐다.

미나야, 여기까지만 데려다주어도 괜찮아.”

아냐, 혹시 모르니까 내가 집까지 같이 가줄게. 그 자식이 해코지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한테 미안해지는 걸.”

미나는 너무 착하고 다정했다. 그 다정함에 봄을 처음 맞이한 눈처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 그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 저 사람!!”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삿대질하며 나를 부른 그 남자는 옆의 일행을 홀로 놔두고 내게 다가왔다. 미나는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는지 나를 뒤로 숨겼다. 온몸으로 경계를 했지만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 뭐였지. 아이디 HOO3246 인가?” 너무나도 익숙한 아이디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그때 일행인듯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이디는 뭔 아이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뭐하는 짓이야.”

아니 그 있잖아. 아 너는 모르겠네.”

뭐라는 거야.”


이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확신이 섰다. “아니 아무튼, 그 사람 여자 친구 맞죠?” 그 게시글은 본 사람인가 보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일 줄이야. 당신도 알아요? 걔가 불법 포르노에 당신 사진 올린 거.” 남자의 말 한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군가 내 심장을 두 손으로 꽉 부여잡는 것 같았다. 숨이 차올랐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남자의 일행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너 불법 포르노 해? 미쳤어?” 남자는 일행의 말을 무시한 채 제 말만을 이어나갔다.

몰랐나 보네. 알았으면 내가 바로 대시했는데, 그런 애보다는 내가 낫지 않아요?”


고개를 숙이면 보이는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우울함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든 색들을 겸허히 받아들인 검은색이 너무나도 밝게 빛났다. 눈동자에 비치는 흑색은 점차 자리를 넓혀갔다. 나도 하나가 되고 싶다. 내가 사라져 버린다면 이 고통도, 누군가의 노력과 슬픔도 잠시 멈춰가도 될 텐데. 서서히 슬픔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미쳤어요?” 미나의 목소리에 따스한 오후의 졸음에서 깨어나듯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미나는 매우 화가 난 듯했다. “지금 길에서 모르는 사람 붙잡고 뭐하는 짓이냐고요. 지금 당신이 하는 거 성희롱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꺼지라고, 이 개자식아.”


미나는 계속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평생 욕 안 쓰겠다고 다짐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이 여자가 진짜!” 그 남자는 급기야 위협적으로 손을 번쩍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이 그 남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 너 아직도 버릇 못 고쳤냐? 사람 패는 거 자랑 아니니까 그만해라.” 남자의 손목을 붙든 일행의 손에 핏줄이 섰다. 남자는 놀란 표정으로 일행의 손을 뿌리치더니 피가 쏠려 붉게 변한 손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이게 내 잘못이냐? 그냥 물어본 거뿐이잖아!” 남자의 태도에 일행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쓰레기랑 말을 섞은 내 잘못이지. 그냥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곧네 꽁지 빠지도록 도망갔다. 일행은 그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우리에게 다가오고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친구를 잘 못 둬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네요. 저는 김주하라고 합니다. 명함 드릴 테니 연락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미나는 나를 대신해 명함을 받았다. “, 나중에 연락드리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리를 떴다. 시선이 느껴져 뒤를 살짝 돌아보니 김주하라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낀 그 사람은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유약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강인해 보였다. 그 사람은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눈이 마주친 걸 알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저 사람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 일이 생긴 후로 처음 받아보는 사과였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길거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두려웠지만 갈무리되지 못 한 감정을 막지는 못 했다. 나를 집어삼키려던 보도블록 사이로 눈물이 떨어졌다. 손과 얼굴에 물이 흥건하도록 울었다. 미나는 그저 옆에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를 새도 없이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이 원망스러웠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었지만 왜인지 머나먼 예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과거를 추억하고 나아간다. 추억하지 못할 만큼 아픈 과거는 바다로 흘려보내고 이따금씩 우연히 해변가로 돌아온 과거는 마주해도 괜찮을 때, 그때 다시 추억한다. 사람은 과거를 추억하는 존재, 그렇기에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은 미래를 위한 원동력이 된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커튼이 쳐진 창문 앞에 섰다. 먼지를 가득 먹은 청회색 커튼이 코를 간지럽힌다. 재채기가 나오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에 얽매이는 건 이쯤 하는 게 좋겠지.’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삶의 원동력,

과거에 얽매이는 것은 삶의 족쇄.

오늘 그 족쇄를 끊어내 보려 한다. 내일을 위해서.

손을 천천히 뻗었다. 손 끝으로 까슬까슬한 커튼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크게 숨을 내쉬고 양손으로 커튼을 쥐었다. 그리고 양팔을 크게 벌리며 커튼을 쳤다. 촤르륵 - 조용한 방안에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커튼이 열리고 커다란 창으로 여명이 드리웠다. 주홍빛 태양이 새까만 어둠을 몰아내고 푸르른 하늘을 만들고 있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방에 알록달록한 색이 물들었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을 느끼며 창을 열었다. 여는 순간, 새벽의 상쾌한 사람이 방을 가득히 채웠다. 바람과 인사를 나누며 온몸으로 평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책상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휴대전화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 - 뚜르르르르-

-여보세요?

살짝 놀란듯한 미나의 목소리에 심호흡을 크게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나야, 오늘 잠깐 만날래?”

누군가로 인해 한 번 지고만 꽃이 다시 봉우리를 트는 순간이었다.


1년 후

사람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사람을 통해 낫는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 내게도 찾아왔다.

유솔아!”

미나야! 주하 오빠!”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애는 징역 3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나에게 폭력을 가한 것이 큰일을 해준 것 같다. 솔직히 더 큰 벌을 받았으면 하지만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연을 쌓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 차가 좀 막혀서

흐응? 그거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미나가 장난 가득한 얼굴로 너스레를 놓았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 목소리를 높였다. “미나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실 미나의 말이 맞았다. 오랜만에 한껏 꾸미느라 조금 늦은 것이었다. 중단발 정도 되는 머리를 고데기로 정리하고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분홍색 원피스에 하이힐까지, 기분 좀 내려고 꾸민 건데 지각할 줄은 몰랐다. 주하 오빠는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헤실헤실 웃고만 있었다.

오빠 무슨 좋은 일 있어요?”

?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뭔지 가르쳐주세요!”

내가 넉살 좋게 되묻자 우리를 지켜보던 미나가 수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근데 우리 레스토랑 430분까지 아니야? 벌써 4시야.”

그러네, 빨리 가야겠다.”

나는 뭔가 의심이 생겼다. ‘뭐지?’ 그 의심도 주하 오빠가 나를 불러 끊어져버렸다. 오빠의 차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갔다. 입구 앞에 서자 건물의 외관이 보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작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오빠, 여기 너무 비싸 보여요. 미나도 놀란 것 같은데.” 주하 오빠는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냐, 내가 살 건데 뭐

그러니까 걱정이란 말이에요.”

주하 오빠는 소극적인 내 말투에 귀엽다는 듯이씩 웃어주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그때 미나가 전화를 한 통 받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가야 할 것 같아…….”

? 무슨 일인데?”

신입이 사고 쳤대내가 선임이라서 가야 할 것 같아. ”

아쉽지만 할 수 없네.”

미나는 재판이 끝난 후에 작은 디자인 회사에 취업을 했다. 꽤 유능한 사람으로 치부되는지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다음에는 꼭 같이 밥 먹자!”

! 꼭 먹자!”

그래, 미나야. 내가 다음에 밥 사줄게.”

미나를 배웅하고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들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 미나를 보았다.터덜터덜 걸어가는 게 많이 지쳐 보였다.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꼬리에 잔뜩 빛을 내는 눈동자. 그 밑에는 거뭍한 다크서클 자리 잡고 있었다. 턱선에 맞춰 짧고 깔끔하게 자른 검은 단발머리 밑으로 보이는 어깨가 왜인지 무거워 보였다.

다음에 같이 여행이라도 가야겠어.’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가자 정갈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레스토랑 2층의 룸으로 이동했다. 자리에 앉고 오빠에게 주문을 맡긴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룸이라니, 꽤 비쌀 텐데.’

너 지금 비쌀 텐데 이 생각했지?”

주문을 끝낸 주하 오빠가 내게 말했다. 가끔 귀신같이 내 속을 알아차리는 오빠가 신기하다. “? , 아니에요내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오빠는 즐겁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또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다. 그러던 와중 오빠가 내가 앉은 의자 쪽으로 왔다. 그리고 슈트 재킷을 벗더니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옷으로 덮어.”

감사합니다.”

괜히 부끄러워져 목소리가 개미처럼 작아져버렸다. 누가 심장을 깃털로 간지럽히는 것 같다. 차례차례 음식이 나오고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 시간을 즐겼다.

그때 생각나요?” 나는 물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

우리 처음 만났을 때요.”

내가 그때 이야기를 꺼내자 오빠가 살짝 멈칫한 게 눈으로 보였다.

괜찮아?” 오빠의 질문에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이미 지난 일인걸요.” 내 말에 오빠는 살짝 안심한듯했다.

그때, 저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인사해 준 것 도요.” 오빠는 내 말의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때 저는 위로보다도 사과가 받고 싶었나 봐요. 대신사과해줘서 고마워요. 비록 그 사람에게 사과는 받지 못했지만 오빠가 해준 것으로도 충분해요. 정말 고마워요.” 오빠는 내 말을 듣다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건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래도 고맙다고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네 덕분에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나는 묵묵히 오빠의 말을 들었다.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너를 만나고 제대로 된 꿈이 생겼지. 그때부터 너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어. 지금은 실무수습을 하고 있지만, 꼭 멋진 변호사가 되어서 너의 편이 되어줄게.” 오빠는 내 옆 쪽으로 와서 한쪽 무릎을 꿇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나랑 사귀어줄래? 나도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 때문에 앞이 흐리게 보였다. 눈물이 떨어지고 행복한 얼굴로 내게 반지를 내미는 주하 오빠가 보였다. 나는 울음을 잔뜩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덜덜 떨며 손을 내밀자 오빠가 반지 통에서 반지를 꺼내 내 왼손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손이 맞닿은 자리가 불이 덴 것처럼 뜨거워진 것 같다. 만약 이유가 있다면 오빠가 너무 따뜻해서 일 것이다. 반지를 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때 오빠가 말했다.

나는 반지 안 끼워줄 거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오빠를 바라봤다. 눈 밑과 코 끝이 빨개지고 눈물 때문에 화장이 번져 흉해 보일 텐데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웃고 있었다. 오빠에게서 반지를 건네받고 오빠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오빠는 커다란 손으로 내 눈물 닦아주었다.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말았다.


오빠가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다음을 약속하며 오빠를 배웅했다. 반지를 만지작 거리며 집으로 갔다. 외출 준비하느라 난장판이 된 집이 나를 반겨주었다. 요리조리 옷 사이만 밟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그때 미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유솔아 좋은 시간 보냈어? 반지는 마음에 들고?

설마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반지도 나랑 같이 골랐는데?

? 그럼 레스토랑도?”

-그건 주하 씨가 골랐지, 너 시선 받는 거 안 좋아하니까 룸으로 골랐대.

그럼 너 일은?”

-~ 원래 슬쩍 빠지려고 했는데, 진짜 일이 생겨버렸지 뭐야

이게 모두 계획된 거라니괘씸하면서도 이벤트를 준비하는 오빠의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때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를 확인하니 오빠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즐거웠어. 잘 자고,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텍스트 하나에도 오빠의 마음이 담겨있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THE END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보세요.

과거는 가끔씩 추억하고 현재의 순간을 사랑하고 미래를 갈구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보세요.

 

나는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연도, 조연도, 감독도, 작가도 모두 ,

오로지 나만이 만들어가는 영화.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영화는 너무 길다.

그렇기에 프롤로그만 보고 꺼버리기에는 아쉬운 것이다.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지금은 지루해서 잘라버린 장면이지도 모른다.

그러니 순간이 과거가 되길 바라며 나아가라.

영화의 결말은 끝까지 보기 전에는 알 수없다.

당신의 인생이 해피엔딩인지,

아니면 배드 엔딩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웃지 못할 코미디인가,

아니면 믿을 수 없는 판타지인가.

 

-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어른이 되지 못 한 어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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