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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미술작품을 보는 것은 당신을 다른 장소로 이끈다일상을 향상시키고, 시대를 돌아보게 하며,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존재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레이첼 화이트리드 수많은 예술가들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예술작품에서 묘사해왔다. 그것은 상상 속 괴물을 묘사한 중세 태피스트리일 수도 있고, 터질 듯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과감한 색으로 표현한 현대 추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천년의 미술사에서 빈 공간을 실체로 만든 작품은 1988년 한 여성에 의해서였다. 만질 수 있는 형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신선한 발상, 소외된 것들, 잊혀지고 핍박당하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 그 관심의 한가운데 사람에 대한 애정, 인권에 대한 호소가 있다. 이런 것들이 레이첼 화이트리드를 특별한 미술가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작가적 시선으로 건축을 직접적인 서술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나 건축의 요소들-거푸집, 강인한 직선과 거대한 질량을 통해 메세지를 드러내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얕은 숨 Shallow Breath>, 생의 마지막 숨결을 보이게 하다. 영국의 조각가 레이첼 화이트리드는 1988년 첫 개인전에서 ‘공간’을 거푸집 삼는 독특한 작품을 선보인다. 집에서 보는 일상적 소재를 다루되, 눈으로 보이는 겉면이 아니라 그 속을 외부로 드러낸 것이다.이 전시에서 발표된 ‘얕은 숨(Shallow Breath)’ 역시 침대 매트리스와 바닥 사이의 좁고 어두운 공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위해 작가는 전시가 있기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썼던 침대의 매트리스 아래에 들어가 본을 떴다. 그리고 얕은 숨이라 명명한다. 우리는 이 뭉툭한 사각 덩어리 앞에서 임종의 순간, 마지막 숨이 아버지의 병든 몸을 얕게 스치며 지나갈 때, 함께 가늘게 흔들렸을 그 매트리스와 아래 어둑한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소중한 이의 마지막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그리고 깨닫게 된다. 작가가 보이게 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공간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시간이며 그 시간의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을. <집 House>, 집이 놓인 사회적 맥락을 보이게 하다. 이후 그녀의 작품은 점 점 규모가 커지고 건축적인 형태를 띄었다. 1993년 발표한 ‘집(House)’에서 그녀는 3층짜리 주택 전체를 거푸집으로 사용하여 내부에 콘크리트를 붓고 건조시킨 다음 틀이 된 주택을 해체했다. 주택의 내부공간은 고스란히 작품으로서 외부에 드러내졌다. 거푸집으로 사용된 집은 산업혁명기에 런던 동부에 조성된 빈민가 주택 중 하나였는데 지역 전체가 재개발되는 가운데 집주인의 반대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집이었다. 집주인 시드 가일은 정부의 무작위적 개발에 반대하여 집을 지키고 있었고 이를 알게된 레이첼이 가일과의 협의하에 집을 작품화한 것이다. 재개발 계약에는 주택을 철거하라는 내용만 있을뿐 주택내부 공간에 대한 내용이 없는 점을 이용하여 법이 요구하는 주택철거를 함과 동시에 콘크리트로 내부공간을 남겨 난개발에 저항하는 상징적 조형물을 만든 것이다. 이후 영국사회에서는 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작품으로 두고 보존할 것인지, 아니면 부술 것인지 찬반논의가 지역 재개발과 함께 이슈가 되었다. 그 사이 수천 명의 관람자가 지역을 찾아왔고,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기에 이른다. 많은 남성작가들의 건축적 조각들이 웅장한 규모와 구조를 통해 권위적이고 압도적인 힘을 내재화한 반면 화이트리드는 견고해보이는 건축물 외형 안에서 약하고 무너져가는 것들을 있음을 드러내고 까발린 것이다. 결국 1993년 8월 ‘House’는 재개발을 위해 부수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그 결정이 이루어진 날 화이트리드는 여성 최초로 영국 미술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터너상을 수상한다 『홀로코스트 기념관』, 레이첼 화이트리드 작, 사진: Hans Peter Schaefer, CC BY-SA 3.0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세계는 다시금 시대를 조망하는 길로 나아갔다. 1995년 비엔나 유태인 학살 기념관 공모에 당선되어 5년만에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낭만적인 비엔나의 거리에 세워진 학살 기념관은 투박하기 이를데 없다.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에는 창도 없고 문이 있으나 문고리가 없다. 들어갈 수 없는 건물이다. 벽은 거꾸로 돌려진 책이 빽빽이 꽂힌 모습이다. 그래서 일명 이름없는 도서관이라 불리운다. 왜 책이었을까? 왜 도서관이었을까? 수백만명의 죽음이라는 인류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건물의 이 고요함과 침묵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눈 앞의 비극을 가능케 했던 수많은 이들의 침묵일까? 책이 있으되 읽을 수 없고, 건물이 있으나 들어갈 수가 없는 도서관은 수천년 쌓아올린 인류 지식과 지혜가 눈먼 증오와 야만 앞에 무릎꿇었던 시대에 대한 은유이며 경고다. 레이첼은 보이지않는 것을 너머 보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묻는다. 그녀에게 있어 보는 것은 눈이 아니다. 마음이며 선택이다. 『둑』, 2005, 레이첼 화이트리드 작, 사진: Fin Fahey, CC BY-SA 2.5
2021-09-13
독일 베를린에는 전쟁피해자를 추모하는 기념관 ‘노이에 바헤’가 있다. 웅장한 기념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피에타’라 불리는 조각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피에타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을 어머니 마리아가 껴안고 슬퍼하는 도상을 말한다. 성스러운 모자를 묘사한 수많은 피에타상들이 있으나 ‘노이에 바헤’의 피에타는 성스럽다기 보다 인간적이다. 조각상 위의 천장이 원형으로 뚫려있어 모자상이 고스란히 비와 눈을 맞도록 한 것조차 그러하다. 웅크려 앉은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여윈 몸을 자신의 온 몸으로 감싸안고 한 손은 아이의 이마를, 또 다른 손으로 온기를 잃은 두 손을 사랑스럽게 매만지고 있다. 여인의 얼굴은 투박한 두건으로 가려져 미간에 패인 깊은 주름만이 그녀의 고통을 전한다. 생명이 사라진 자식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깊은 통증이 고요한 공간 가득 소리없이 울려퍼지고 있다. ‘내 아이야…!’ 아들의 주검과 하나된 어머니의 청동상은 어떤 말도 대신할 수 없는 말로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전한다. 아이를 잃은 여인은 조각을 만든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든 케테 콜비츠의 아들은 1차대전 중 자원입대하여 열여덟의 나이로 전사했다. 참전한 지 두 달만의 일이었다 . 케테 콜비츠는 1867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일찍 예술을 접하였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문적인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었다. 1889년 베를린에 가서야 여자예술학교에 입학하여 판화와 회화를 배웠다. 결혼 뒤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의사였던 남편 칼 콜비츠를 따라 빈민가에서 생활했는데 이 경험은 콜비츠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케테는 노동자들의 삶을 알게 되면서 특히 노동자 계급의 여성이 처해있는 현실에 분개했다. 여성들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았고 그나마도 건강하고 임신하지 않았을 때야 가능한 일자리였기에 불법적인 임신중절이 흔하게 행해졌다. 케테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운명에 연민을 느꼈으나 작품 속에서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삶에서 보여주는 역동성과 소박한 숭고함에 주목했다. 1903년 그녀의 대표작 <폭발>은 저항하는 농민들을 이끄는 여성의 뒷모습을 긴장감 가득한 필치로 묘사하여 억눌려있던 이들의 열정과 시대를 선도하는 힘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1910년대 그녀가 만든 <직조공들>, <농민전쟁> 판화 시리즈는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아름답고 강렬하게 묘사했다. 케테는 예술이 예술가의 스튜디오를 넘어서서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과 만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1914년 7월 1차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전까지의 전쟁들은 대부분 짧고 전투 한두번으로 종결되었기에 사상자도 적고 피해도 적었다. 사람들은 이번 전쟁 역시 마찬가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것은 산업혁명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이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기를 만들어냈고, 그 발전이 전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참혹한 전쟁이 이제야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1914년 10월 30일 케테 콜비츠의 일기에는 단 한줄만이 적혀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세상을 흔들었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대의를 위한 싸움을 고귀하게 표현했다면 이제 다른 질문이 그의 그림에 등장한다. ‘과연 고귀한 희생이란 존재하는가’ 그는 오랜시간 자신의 슬픔을 녹여 <전쟁>연작 시리즈를 만든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 이상 누구도 전사해서는 안된다.’ <지원병들>에서는 해골모습의 병사, 우는 병사 등으로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전쟁의 모습을 표현했고, <과부>, <부모> 등의 작품에서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이와 연관된 사람들의 슬픔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전한다. 1934년 독일에 극우적인 나치정부가 집권한 뒤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전쟁은 이제 그만>과 같은 작품을 통해 반전과 평화를 향한 목소리를 높였다. 나치 정권은 그녀의 반전 미술이 전시되는 것을 금지시켰고 공개된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막았다. 강요된 침묵 속에서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1937년 모두의 아들을 위한 진혼곡과 같은 ‘피에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2차대전이 일어났다. 그녀는 다시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손자 페터를 폴란드 전선에서 잃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유언과 같은 작품을 남기며 말했다.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그림 속 한 늙은 여인이 망아지처럼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하는 소년들을 숨기고 그 위로 팔을 힘있게 뻗친다. 케테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작품 속 여인들처럼 가녀린 생명을 보호하고 세상을 힘차게 끌어안으며 떠났다. 문현여자고등학교 교사, 작가 이서연
2021-06-11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앞에는 조각들이 물 위를 빙글빙글 돌며 물을 뿜는 ‘스트라빈스키의 분수’가 있다. 경쾌한 색깔로 묘사된 방울뱀, 빨간 하트 그리고 거대한 여성의 몸이 물을 뿜어내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발랄하고 기분 좋은 에너지를 선사한다. 가슴과 엉덩이가 과장되게 묘사된 여성은 ‘날씬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낙천적이고 행복해보인다. 이 조각을 만든 프랑스 예술가 ‘니키 드 생팔’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여성상을 시리즈로 만들고 이를 ‘나나’라고 불렀다. 니키 드 생팔의 ‘나나’ 시리즈는 하얀 피부와 금발이라는 전형적인 서구 미인의 기준을 무시한다. 그녀들은 검은 피부이거나 녹색, 분홍색 등 각양각색이고 아예 눈, 코, 입이 없는 경우도 많다. 나나들은 오동통한 몸매로 하늘을 날고, 춤을 추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몸짓을 선보인다. 한 눈에 봐도 활기차고 사랑스럽다. ‘인형 같은 얼굴, 날씬한 몸매가 아니 라도 나는 이 몸을 사랑하며, 여기 내 삶을 살고 그래서 행복하다’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전형적인 금발 미녀였던 예술가 니키 드 생팔이 이토록 해방감 넘치는 ‘나나’를 만든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니키는 부유한 프랑스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1세에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나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억누르며 비밀을 지켜야했다. 성장기 잦은 문제행동으로 퇴학과 전학을 반복하다가 18세에 이른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의 바람기로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을 하다 날씬한 몸매와 외모에 대한 강박이 심해져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시기에 치료의 일환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 중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 ‘사격회화’다. 사격회화는 캔버스 위에 물감주머니를 달고 그 위를 석고로 바른 뒤 총으로 쏘아 물감을 터뜨리는 것이다. 물감이 터진 캔버스는 마치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하는 것 같다. 사격을 할 때 그녀가 캔버스 위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했던 위선적인 세상에 대한 분노? 날씬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좌절감? 그 무엇이었든 그녀는 이 과정을 통해 가부장적 질서에서 억눌렸던 자신의 목소리를 회복하고 고통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사격회화 이후 한층 자유로워진 니키는 나나 시리즈를 만들었다. 임신한 친구를 모델로 크고 풍만한 몸매를 가진 나나가 탄생한 것이다. 뚱뚱하고 분방한 모습의 나나는 기존의 관념화된 미의식으로 정의될 수 없는, 살아있는 여성들의 수 만큼이나 다채로운 사랑스러움에 대한 찬가다. 나는 나이기에 이미 충분해라고 말하는 ‘나나’다. 니키의 성장은 예술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온전히 직면하고 자하는 용기와 자기사랑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주위로 확장되었다. 이혼 후 만난 연인 장 팅겔리는 평생의 예술 동지로서 그녀를 지지해주었다. 그들은 앞서 본 스트라빈스키 분수와 28미터 길이의 거대한 설치미술 Hon(성당) 등을 함께 완성했다. 또한 니키는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미술이 주는 기쁨과 삶의 지혜를 나누기를 원했다. 예루살렘 빈민가에 세워진 그녀의 작품 ‘Golem’은 기발하고 창의적인 예술작품으로서뿐만 아니라 지역의 아이들이 즐겨 찾는 놀이마당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기리고 있다. 문현여자고등학교 교사, 작가 이서연
2021-06-10